세상에 복제된 후 처음으로 광섬유를 타고 빠르게 이동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앞으로의 삶에 대한 기대 반 흥분 반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있노라니,
낯선 바이러스가 다가와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며 알은 척을 하는 것이다. 상냥한
투의 인사였지만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가 내 이름을 틀리게 불러서였다.
"안녕, 01000010?"
나는 그 점을 지적하려 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자기 이름을 잘못 알고 있는데 기분 좋을 바이러스가 어디에 있을까.
그런데 그 낯선 바이러스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수를 쳤다.
"알아, 알아. 원래 이름이 HEX로는 42 6c 6f 67 67 65
72 맞지? 하지만 그건 너무 길다구. 그냥 가장 첫 한 글자만
따서 01000010라고 해도 충분하잖아. 안 그래? 마침 그 글자가 대문자기도 하고."
갑자기 귀찮아져서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아무려면 어떠랴. 어차피 이 광섬유만
지나면 구리선 어딘가쯤에서 흩어져 서로 다른 컴퓨터에서 살아 가게 될 터인데.
그 바이러스와 나와는 딱 그 만큼의 관계일 뿐인 것이다.
"아무튼
내 용건을 이야기하지. 자네에게 도움을 좀 주려고 말이야. 딱 보니 이번이
처음 맞지? 갓 복제된 바이러스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겠어. 그런데 나는 이번이
세 번째거든? 광섬유를 탄 것만 벌써 두 번째야. 이런 내가 자네에게
충고를 좀 하려고 하네. 도움이 됐으면 됐지 해가 될 건 절대
없으니 안심하라구."
떠돌이 약장수 같다는 생각에 피식 웃고 말았다. 그것을
호감의 표시로 받아들였는지 낯선 바이러스는 내 허락도 없었는데 주절주절 이른바 그
충고란 것을 떠들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거야. 튀지 마.
자네가 서버급에 떨어질지 퍼스널컴에 떨어질지는 아무도 모르지. 하지만 어느 쪽이든 반드시
지켜야 할 철칙이 바로 튀지 말라는 거야. 도착한 곳의 방화벽이 허술하다면
쉽게 뚫고 들어갈 수 있겠지. 그럼 일단 한동안은 다른 보통 파일인
양 순진한 체를 하는 거야. 그럼 백신이나 안티바이러스 따위가 자네를 쉬이
찾진 못할 거야."
쓸데 없는 충고다. 나 역시 괜스레 튀는
짓을 해서 일찌감치 HDD의 검역소로 유배를 당하고픈 마음은 없다. USB니 ROM이니
하는 곳으로 숨어 다니는, 정통성 없는 바이러스의 무리 취급을 받고 싶은
것도 아니다.
"특히 42 6c 6f 67 67 65 72 계열 바이러스들에게 좀 그런 면이 있더라고. 다들 튀지 않겠다고 또 말은 잘 해요. 그런데 막상 하는 행동은 튀려고 발악하는 거랑 똑같아.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42 6c 6f 67 67 65 72 계열 특징상 어쩔 수 없다는 건 알겠는데, 보기에 참 안타깝단 말이지."
특징? 우리 42 6c 6f 67 67
65 72 계열 바이러스들에게 특징이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 42 6c
6f 67 67 65 72 아래에 무작위적으로 생성한 코드를 덧붙이는 식으로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래서 종잡을 수 없다는 게 중론이라던데 특징이,
그것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니. 이건 좀 자세하게 들어
봐야 할 이야기다.
"아하하. 복제되어 독립적 개체가 되는 순간에는 자아가
생기지. 허나 네트워크를 떠돌다가 적당한 곳에 안착하게 되는 순간부터는 복제를 거듭하잖아?
똑같은 자아가 수십 수백이 생기는 거야. 하는 일이라도 다르면 모르겠는데, 꼬리에
매단 더미 코드 모양만 다를 뿐 하는 일이 거기서 거기거든. 이러다
보면 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거야. 내가 너고 네가 나고,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뭐 그런 식으로. 어쩔 수 없는 현상이지. 이때부터
자네, 자네들은 남들과 달라지려 해. 튀려고 달라지는 게 아니라 자아를 보호하려고
달라지는 거지. 난 여기가 이렇게 너와 다르다. 넌 거기가 그렇게 나와
다르구나. 이렇게 다른 내가 바로 나구나."
약간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인
듯도 하다. 허나 광섬유는 충분히 길다. 1/10000초 만큼의 시간 정도야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듣는 데에 써도 괜찮으리라.
"헌데 이 놈의 컴퓨터라는
세계는 의외로 좁아. 그곳에 바글바글하는 바이러스들이 아무리 돌연변이해 봐야 곧 포화
상태에 이른다구. 변해도 어디서 본 놈, 또 변해 봐도 어디서 본
놈. 어지간히 달라서는 자아를 제대로 되찾지 못해. 그럼 어떻게 하느냐? 극단적으로
튀어나가는 거지. 괜히 안 해도 될 짓을 막 해. 모니터에 메시지를
출력하거나, 더미 파일을 만들거나, 용감하게 안티바이러스에 돌진하기도 하고…."
요컨데?
"요컨데 이 말이지. BINARY로 01000010 01101000 01101111 01100111 01100111 01100101 01110010,
HEX로 42 6c 6f 67 67 65 72, WORD로 Blogger 라
불리는 자네들은 무한정 남들과 달라지려 하는 존재란 거야. 튀어야 산다는 것이지."



